Date : 2006/08/10, Hit : 7422
제목    사진작가의 실미원 방문기(하)
작성자   이선










(전편에 이어 계속...)

무의도는 초행길이라 배에서 내리고 보니 사방천지가 어두워 어디가 어딘지 분간하기가 곤란했다.

물론 섬길이니 외통수길일 테고 그 길로 끝까지 가봤자 맨날 그 자리에 다시 올 수밖에 없겠지만

우리가 가본 그 길의 끝이 하나개해수욕장 입구였다.



그때가 밤 아홉시쯤 되었을까?

도빈맘 폰으로 무의도에 들어왔다는 신고전화를 넣었다.

내일 온다던 사람이 갑자기 하루 일찍, 그것도 야심한 시각에 들어와서는 방을 내 놓으라 했으니

아마 도빈맘도 좀 당황하기는 했을 것이다.

농장에서 막 퇴근하려는 부부를 붙잡아 놓고

어두운 길눈으로 실미원을 찾아가는데는 나도 눈뜬 봉사처럼 긴장이 되었다.

꼬불꼬불 산을 거의 다 넘어오자 대형 비닐 하우스 앞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부부가 서 있었다.



농사를 오랫동안 지어온 농부의 얼굴을 보면 금방 농부라는 티가 난다.

즉, 무엇으로도 살 수 없는 순박함이 얼굴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평생동안 농사만 지어온 내 백부(伯父)가 그랬고 이미 그 흙으로 돌아가신 내 외삼촌도 그러했으며

오늘밤에 본 구릿빛 얼굴에 수염이 듬성듬성하게 난 신순규 농부도 그랬다.



희미한 가로등 조명으로 내가 본 신순규의 첫 모습이었다.

얼굴에 잔잔하게 퍼지는 미소가 순수했고

해 맑은 어린이와 같은 표정이 하얀 치아 곳곳에 배여 있었다.

얼마 전에 시설했다며 대형 비닐하우스 문을 홱 밀치자

하늘 높은 도쿄 돔구장 같은 내부가 나타났고

축구장처럼 길게 이어진 맞은편 하우스 안에는 이제 막 연꽃이 피기 시작하는 연 밭이 길게 조성되어 있었다.

20여분동안 하우스안을 설명하는 내용으로 봐서는 깜깜한 밤에 내가 그 규모를 짐작하기 힘들었다.



낮에 힘들게 일한 피로가 옆모습으로도 확연하게 보였지만

처음 본 우리 가족을 위해 열심히 농장안을 설명해 주고 계셨다.

계속 붙잡아 많은 얘기들을 듣고싶은 욕심보다

피곤한 농부의 휴식시간을 우리가 너무 뺏는 것 같았다.

집에 가서 편안히 쉬어야하는 시간을 계속 뺏을 수 없어 내가 쫓아내다시피 하여 부부를 고홈(go home)시켰다.

그리고 우리는 비닐하우스 안에 마련된 방에서 모기장을 치고 첫밤을 자게 됐다.



도빈맘님의 말에 의하면 모기가 우글거리는 비닐하우스 안에

꼭 하룻밤을 재워주라는 땡모님의 심술전화가 있었다고 했다.

땡모의 소원과는 달리 다행히 그곳에는 모기장이 있었다.

물론 모기장이 없었다면 땡모의 심술대로 밤새도록 보초를 섰겠지만

실미원의 모기장은 우리를 잘 감싸주었다.

차에 있는 매트를 끄집어내 자리를 깔고 누웠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눈앞에서 펼치는 연밭 개구리들의 하모니에 이름 모를 풀벌레들이 코러스를 넣고

먼산 부엉이의 저음 장단이 끝없이 이어졌다.

그야말로 자연의 합창단이 한 여름밤을 수놓고 있었다. 이보다 더 아름다운 하모니는 없었다.

어린 시절 시골집 마당에 모기장 치고 자던 생각이 났다. 언제 잠이 든 줄 모르게 꿈속으로 빠지고 말았다.







닭들의 울음소리에 잠을 깼다.

자연이 주는 소리는 머리를 맑게 하는가?

평소 뒤척이던 5분의 대기시간도 없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밖을 나가보니 먼동이 트고 있었다.

어젯밤과는 달리 초록의 빛들이 섬안 가득 생소한 무의도의 곳곳을 보여주고 있었다.

무의도는 영종도 코밑에 있는 작은 섬이다.

행정구역은 인천시 중구 무의동이며 600여명의 주민이 살고 있다고 한다.

섬의 형태가 장군복을 입고 춤을 추는 것 같아 무의도(舞衣島)라고 한다는데

썰물이 되면 걸어서 들어갈 수 있는 실미도가 무의도에 바짝 붙어 있다.

"천국의 계단"과 영화 "실미도"가 이곳에서 촬영되었다고는 하나

한시대의 아픈 기억 때문인지 실미도의 촬영 세트장은 흔적도 없이 철거되었다고 한다.







새벽산책을 겸해서 그가 조성했다는 연밭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군데군데 새벽기운을 받아 하얀 백련이 피기 시작하고

이제 막 꽃대를 올리는 크고 작은 연봉오리들이 하늘로 향하고 있었다.

연밭을 걸을 때마다 연잎에 맺혀 있는 보석같은 이슬이 굴러내려 바짓가랑이를 적셨다.

그리고 습한 기운 따라 피어오른 연향은 정말 찐했다.

새벽연기처럼 은은하게 퍼지는 연향에 취해 한송이 연꽃 앞에 주저앉았다.

연밭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정말 신기한 장면들이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한여름의 뜨거운 열기가 촌음처럼 짧았는지

이른 새벽인데도 실잠자리들은 벌써 신방을 꾸미고 있고

눈길 가는 곳마다 표피를 막 벗 던진 잠자리들의 화려한 우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아직 꼬리도 덜 빠진 눈꼽째기만한 청개구리도 보호색을 만들고

그 옆에는 거미들의 아침식사가 성찬을 이루었다.

아침 햇살에 날개를 말려 화려한 비상을 꿈꾸는 왕잠자리도

내 어릴 적 기억을 고스란히 되살려 주고 있었다.

대충 눈으로 짐작해도 단위면적당 곤충들의 개체수가 이렇게 많이 서식한다는 것이 놀라울 뿐이었다.

그리고 그들 모두가 왕성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햇살이 국사봉을 넘어 실미원쪽으로 눈부시게 내리비치는 시각에

이곳 농장주인 신순규씨가 옆 좌석에 부인 장명숙씨를 태우고 도착했다.

생후 3개월이 되었다는 네눈박이 진돗개(동녘이) 한 마리와 또 한 마리의 조그마한 애완견(또지)을 데리고 트럭에서 내렸다.

신순규씨가 씨익 웃으면서 "잘 주무셨습니까?"하고 인사를 건넨다.







어젯밤에는 자세히 못 봤는데 턱 밑 수염이 듬성듬성 났는데도 불구하고 인사 건네는 첫 모습이 상당히 미남이었다.

굳이 내보고 관상을 한번 봐 달라고 한다면 얼굴에는 칠복상(七福相)이라는 것이 있다.

즉 눈, 코, 귀, 입, 머리, 볼, 턱...

이렇게 일곱가지가 가지런하면 웃을 때 칠복(七福)이 웃는 상이라고 하는데 성인(聖人)의 상을 두고 하는 말이다.

물론 믿거나 말거나...(저 돌팔이입니다. 이 부분에 너무 마음두지 마시길...ㅎㅎ)



어쨌거나 자신을 스스럼없이 농부라고 하는 신순규는 이곳 무의도가 고향이란다.

부인 장명숙여사와는 어떤 스캔들로 만나 결혼했고 지금의 아들, 딸(지용과 도빈)을 낳았는지 나도 모른다.

서울색시를 이곳 무의도 외딴섬까지 꼬셔와서 힘든 농사일 시키는 걸 보면

남자인 내가 봐도 그의 능력은 짐작이 간다.

그러나 평생을 농부의 아내로 살아온 농사꾼 치고

마음에 담아 논 남편에 대한 불만이 없다면 그것은 거짓말일 테고

내 마뉼과의 대화 속에 간간이 남편의 고집얘기를 끄집어내는 걸 보면

"황소 같은 외고집"(실미원 메인 홈페이지 참조)이 부인의 속을 간혹 썩힌 건 사실인가보다.

그 외고집이 2002년, 흙 대신에 유기농법인 수경(물)으로 포도재배가 된다는 것을 인정받아

대한민국 28명의 "신지식인"에 선정되어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고 한다.

농사짓는 농부가 "신지식인"으로 선정되어 받은 상치고는 보통의 상은 아니다.



그는 농사를 지을 때, 한 방울의 농약이나 한 줌의 화학비료도 사용치 않는다.

오직 땅에서 주는 정직한 열매만 고집하는 사람인데

이를 위해서 끊임없이 연구하고 개발하여 농사도 일종의 "경영"이란 마인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자신도 어쩔 수 없는 능력밖의 일이 있다면 그것은 하늘의 뜻이라고 했다.

하늘의 신이 자기를 도와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며 오래 전부터 부부가 같이 교회를 다닌다.

부인 장명숙씨는 그런 남편의 능력을 믿고 그의 뜻에 따라 순종하는 여필종부(女必從夫)였다.

이틀동안 두 분을 가까이서 지켜보았지만 그런 모습들이 보기가 참 좋았다.

농사짓는 틈틈이 시간만 나면 책을 들고 글을 읽는 모습도 보기 좋았고

두 분이 나누는 대화가 농부답지 않게 조용하고 차분하여 나는 오랜 도시생활 뒤의 귀농인(歸農人)인줄 알았다.



최근에는 그도 연꽃재배에 푹 빠져있다.

우리나라 날씨가 예전과는 달리 요즘은 한곳에 집중적으로 비를 퍼붓는 통에

1년 농사를 한순간에 망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실미농원의 지리적인 여건으로 볼 때 많은 비가 일시에 쏟아지면 감당키 어려운가보다.

그래서 그가 생각해 낸 대안이 수경재배에 강한 연꽃을 선택한 것 같았다.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연꽃재배에 대한 연구를 많이 했다고 한다.

나도 연꽃사진을 찍기 위해 무수히 많은 지역을 돌아 다녀봤지만

우리나라에서 부여의 궁남지 이북으로는 연꽃 재배하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그래서 실패할 확률이 있지 않겠느냐고 은근히 걱정을 했더니 역시 날씨 얘기를 먼저 끄집어낸다.

우리나라의 기온이 점점 북상하고 있다며 이곳도 이제는 연꽃재배에 충분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고 했다.

아마도 서울, 경기지역에서 대규모 연꽃재배에 성공한다면 자신이 선봉에 서 있을 거라고 했다.

그리고 무의도를 연꽃이 있는 테마공원으로 만드는 큰 꿈을 가지고 있었다.

오늘도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연 밭에 앉아 무엇인가 열심히 물레질을 하는 그는

"너 참 예쁘다."하고 칭찬을 하면 그 꽃이 말을 알아듣고 정말로 예쁜 꽃을 피워 준다고 했다.







아침해가 중천에 뜨자 장명숙씨가 오골계를 보여주겠다며 따라오라고 했다.

서너개의 긴 비닐하우스를 지나 민가와 제법 떨어진 인적도 없는 곳에서 자연 방사로 오골계를 키우고 있었다.

대략 20여 마리 정도로 보였는데 몸통이 온통 검은색의 닭이었다.



수놈 3마리, 나머지는 모두 암놈이었고 유일하게 병아리 한 마리가 분주하게 돌아 다녔다.

여기서 말하는 자연방사라는 것은 낮이고 밤이고 닭장문이 개방되어

천적으로부터 전혀 보호를 받지 못하는 상태를 말한다.

밤에는 삵이나 고양이, 낮에는 수리부엉이나 매들의 공격에 자신들 스스로가 방어를 해야하는 처지였다.

이렇게 되다보니 건강하고 힘 쌘 오골계는 살아남고 그렇지 못한 오골계는 천적들의 먹이가 된다.

다섯마리를 깐 병아리 중에 유독 한마리만 살아남은 것이 이해되었다.

목숨을 부지한 그 병아리는 살아남는 방법을 터득한 탓으로 행동이 무지하게 빨랐다.

상황이 이 지경인데도 장명숙씨는 조금도 걱정을 하지 않는다.

오골계는 천연기념물 제256호로 지정하여 보호를 받고 있는 닭이라고 한다.

천연기념물인 오골계의 개체수를 건강하게 만들기 위하여 자연방사 방법이 최선이라며 웃는다.

이정도는 되어야 조류독감이 와도 견딜 수 있다고 한다.



그런 얘기를 듣고 오골계를 관찰해보니

주변에 이상한 새소리만 나도 모두 머리를 일제히 쳐들고 긴장을 하고 있었다.

뜨거운 한여름의 대낮인데도 둥지안에는 두 마리의 어미가 알을 품고 있었다.

오골계의 알은 달걀보다도 적었다.

오늘 아침 반찬에 달걀말이가 올라온걸 보니 이제는 암컷들이 제법 알을 까는 모양이다.

우리가 실미원을 떠나던 다음날에도 먼길에 요기하라며

몇 개의 알을 삶아 차 속에 던져준 것이 오골계 알이었는가 보다.







나는 2박2일 동안 그곳에 있었다.

첫째날은 날씨가 너무 더워 실미해수욕장 솔밭에 자리를 깔고 누웠는데

신순규는 그때 빤히 보이는 실미농원 뙤약볕 아래서 연을 고르고 있었다.

내가 그를 도와줄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

과연 농부의 말대로,

고생은 내 대(代)에서 끝내고 자식 대(代)에는 남들처럼 가족과 함께 한가롭게 놀로 다니면서 농사를 짓는 날이 오면

그때는 아들놈에게 농부의 자리를 물려주겠다고 했다.



2006년 8월6일

무의도 실미농원에서....